|
|
"
기다리던 비 "
감 독 : 봉준호
각 본 : 봉준호, 심성보
촬 영 : 김형구 l 편 집 : 김선민
음 악 : 이와시로 타로
출연 : 송강호, 김상경, 김뢰하, 송재일, 전미선, 박해일
평 점 : ★★★★★
|
(중요한 단서와 대사가 적혀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읽으시길)
1. 쉽지만은 않은 게임
화성군 연쇄 살인 사건은 비로소 우리도 범죄 선진국(?)에 들어섰다는 걸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6년간 벌어진 10차례의 강간 연쇄 살인, 피해자의 물건을 이용한 치밀한 살해 수법, 범인을
잡기 위해 동원한 180만 명의 경찰들, 그럼에도 잡히지 않아 아직까지 미해결 사건으로 남아
있다는 점. 관객들의 눈과 귀를 솔깃하게 할 만한 소재임에 분명하지만 언제나 반대급부가 있는
법이죠.
빛나는 원석을 가공하기 위해선 몇 가지 걸림돌이 있습니다. 온건한 스릴러가 되기 위해선 범인의
존재가 필수적이에요. 범인에 대한 사소한 단서조차 잡지 못한 사건이었으니 이 부분에서 픽션이
들어가야 합니다. 유력한 용의자만 나열하다 끝을 마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박두만 형사와
서태윤 형사의 집요한 수사가 영화를 굴러가게 하는 동력이라면 범인의 윤곽은 그에 대한 결실입니다.
무작정 달리게 해 놓고 절벽으로 밀어버릴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영화의 결말은 또 어떤가요? 현실에 입각해 미해결로 남겨 둘지, 전형적인 '형사 영화'답게
범인을 검거할지도 고민거리입니다. 한가지가 더 있네요. 화성군 연쇄 살인 사건은 잊혀진 사건이
아니라 잊혀지고 싶은 우리의 치부이자 상처입니다. 정당한 대의명분이 없이 들춰 버린다면 <살인의
추억>은 얄팍한 상업 영화에 가해지는 비난 이상의 것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2. 내가 범인인가? 아닌가?
"제가 범인이라고 생각하고 연기해야 하나요? 누명을 썼다고 생각해야 하나요?"
세 번째 용의자를 연기한 박해일의 궁금한 점이었습니다. 그러나 감독은 끝까지 답을 주지 않았다고
하네요. <살인의 추억>은 장르의 모양새를 따라가기 위해 유력한 범인을 설정하고 있습니다. 사건에
집착하는 두 형사의 노고를 위해서도 범인에게 분노를 쏟아 버리고 싶어하는 관객들을 위해서도 필요한
과정이죠. 하지만 범인의 정체를 흐려 버리는 엔딩을 통해서 모든 걸 원점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범인 일수도 누명을 쓴것일수 있는 게 아니라 도무지 '모르겠다'식의 결말이죠. 바로 이 지점이
<살인의 추억>을 도식적인 스릴러 영화가 아닌 실제 사건의 숨결을 간직한 영화로 만드는 부분입니다.
사건이 가진 '미해결성'의 감정을 끝까지 놓지 않으려 한 것이죠. <텔미섬딩>식의 빈곤한 논리로
범인의 정체를 지워버린게 아니라 우리 바로 옆에 범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혼란을 주고
있습니다.
3. 두 형사.
'서류는 절대 거짓말 안 하거든요'라고 말하는 서태윤 형사와 "내 눈 똑바로 봐 봐"라며
모든 걸 직감으로 결정하는 박두만 형사의 충돌과 갈등은 '형사 버디물'의 전형적인 기교입니다.
기교가 단순히 눈에 뻔히 보이는 장치로 그치지 않으려면 두 형사의 화해 과정에서 인위성이 없어야
하죠. <살인의 추억>에서 이들을 화해시키는 건 동료애 보단 '사건' 자체가 가지는 강제적인
인력 때문입니다. 범인을 잡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이들을 '진짜 같은 편' 으로 만들죠. 그래서
후반부에서 서태윤 형사가 이성을 잃고 '박두만 형사'화 되가는 모습은 오히려 정감 있게 다가옵니다.
두시간 동안의 스토리텔림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럴 수밖에 없겠지'라며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거죠.
그래요. <살인의 추억>은 이야기가 관객을 억누르려는 게 아니라 관객의 이해의 지점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습니다.
<살인의 추억>은 잘 만든 상업 영화입니다. 감정을 극도로 몰아가고 풀어 주는 기교에도 능하고
배우들의 연기력은 절반 이상이나 남은 지금, 감히 '올해 최고'라고 못밖을수 있습니다. 대사와
애드립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송강호의 연기는 과연 이 상태보다 더 좋은 연기를 보여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죠.
하지만 <살인의 추억>을 가장 의미 있게 만드는 건 영화 전반에 녹아 있는 따듯한 유머 때문입니다.
무거운 실제 사건을 다루면서도 <살인의 추억>이 관객에게 파고들 수 있는 요소는 환기시켜 주듯
간간이 터지는 웃음 때문입니다. 이런 정서가 결국 마지막 장면으로 이어지는 거죠. 용의자를 체포할
증거가 없어 절망적인 심정으로 말합니다. "밥은 먹고 다니냐"
<살인의 추억>은 단지 흥행 영화 한편이 나왔기 때문이 아니라 영화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발견했다는데서 더 소중한 가치가 있겠습니다.
TIP
- <해피엔드>의 정지우 감독과 <복수는 나의 것>의 박찬욱 감독도 영화화를 준비했다더군요.
- 라디오 방송과 관련된 단서는 물론 허구입니다. 하지만 용의자가 기차 사고를 당한건 허구가
아니었다는군요.
- 말보단 '발'이 먼저나갔던 형사는 <플란다스의 개>에서 개잡는 아저씨로 등장했었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