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영사기사의 죽음-알프레도 아저씨를 구하자
- 열악한 국내 영사기사 복지현황

어느 영사기사의 죽음
지난달 20일 새벽 2시 전라북도 번화가의 군산 A극장에서 영사기사 한 명이 숨졌다. 아래층 호프집에서 전기누전으로 난 불이 3층으로 옮겨 붙어 극장은 전소하고 극장에서 잠을 청한 영사기사는 연기에 질식사한 것. 영사기사는 극장주의 조카로 일정한 거주지 없이 자신이 일하는 극장에서 숙식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시네마 천국>의 알프레도 아저씨가 영사기 과열로 붙은 불길 속에서 어린 토토의 노력으로 겨우 목숨을 건졌던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사건이었다.

<시네마 천국> 초반의 주무대였던 2차대전 직후 변두리 극장의 그 비좁고 낡은 영사실과 지금 우리 극장 상황은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영사실은 좁아 최소한의 영사장비만이 갖춰 있고 아침부터 이어지는 상영 일정에 맞춰 영사기사 홀로 영사실을 지킨다. 최근 외국의 기술과 자본을 들여와 지어진 멀티플렉스의 경우 자동화된 시스템, 대기업 약관에 준하는 연봉 등으로 훨씬 나은 근무환경을 보장받고 있으나 변두리 단관 극장들의 경우 상황은 전혀 다르다.

'빨간 날'이 더 괴롭다
전북 익산의 단관극장에서 일하던 박주원씨(45세)는 14년 간 해오던 영사기사직을 최근 그만뒀다. 영사기사라는 직업이 "자격증이 있다고 더 대우받는 것도 아니고, 오래 근무한다고 호봉이 오르는 것도 아니라 진로가 불투명"하다는 것이 그 이유.

어렵사리 관청이 운영하는 문화회관에 취직한 박씨는 매표소에 내려가 표도 팔고 매점도 보고 청소도 해야하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휴일도 보장되고 공무원 월급에 준하는 보수가 주어지는 지금의 관공서로 옮기기를 정말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기 밑에서 영사일을 배우던 후배도 관공서로 옮겨주고 싶지만 결원이 잘 안날 뿐더러 난다고 해도 알음알음으로 금새 충원돼 "하늘의 별따기"라 말한다.
박씨가 극장일을 그만둔 가장 큰 이유는 "빨간 날 쉬지 않는 것". 가족들과의 나들이는 고사하고 집안 행사조차 참석하지 못하는 것이 박씨를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만들었다.

하루 13시간 근무, 월 70-120만원
기계과를 졸업한 26세의 임성제씨는 8개월 남짓 영사기사일을 하다가 현실을 알고 진로를 바꿨다.
현재 작은 프로덕션에 취직, 영상편집을 한다. 감독을 꿈꾸다 '필름이라도 만져보자' 싶어 충무로 작은 단관을 찾아간 임씨는 그곳 영사기사 밑에서 도제교육을 받으며 자격증 시험을 준비했지만 실기시험에 두 번 떨어진 뒤 포기했다. 자격증이 없어도 영사기사협회 준회원 자격이 주어져 영사기사일 하는 데 그리 문제가 없다는 것이 임씨의 설명.

그런데도 임씨가 전직을 한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생계 문제 때문이었다. 자격증없는 아르바이트나 도제교육 기간에는 시간당 2천5백원 정도의 낮은 보수로 버텨야 한다. "몇 백명 앉혀놓고 내가 트는 영화를 보고 웃고 우는 걸 보는 게 보람이었는데 월70-80만원 받고 평생 직업으로 삼기엔 막막했다".
둘째는 개인 시간이 없다는 것. 오전 9시에 출근해 하루는 13-14시간 풀타임 근무하고 자정이 돼서야 퇴근한다. 다음 날엔 오후 4, 5시에 퇴근. 이것을 2교대로 반복한다. 주말이나 휴일에는 더 바쁘고, 심야상영이 생긴 후에는 더욱 혹사당한다는 것. 극장에 따라 다소 편차는 있으나 대부분의 단관 극장 영사 기사의 현실이다.

급변하는 영상환경, 소외받는 영사기사
현재 전국 영화관은 355개관. 복합관의 증가로 스크린수만 687개다. 영사기사협회 회원으로 등록된 자격증 소지자는 1800여명, 자격증미소지자인 준회원만 700여명에 이른다. 이중 관공서나 예술회관 등에 근무하는 이들을 제외하고 영화관에 근무하는 영사기사만 800여명. 그러나 이들 중 영사기사에 직업적 전망을 갖고 있는 이들을 찾기란 힘들다. 속속 디지털화돼 가는 첨단장비를 쫓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불안해 하는 이들도 많다. 보수교육이 절실한 시점이란 것이 윤무영 영사기사협회장의 설명이다.

새정부가 들어선 후 자격법에 의한 599개 종류의 보수교육이 폐지됐다. 영사기사협회에서는 자체적으로 보수교육을 운영해오고 있으나 영사관련 장비들이 워낙에 고가인 데다 첨단화되고 있어 협회차원의 지원만으로는 역부족인 실정이다. 영사기사협회는 현재 영진위 영화단체사업지원에 보수교육 사업지원을 신청해놓은 상태.

최소한의 근로기준법만이라도 지켜달라
최근 부산·대한·삼성극장의 극장노동자 30여명이 부산지역극장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국내 최초의 극장노조로 당초 영사기사 노조를 꾀했으나 영사기사가 수적으로도 워낙 열세인지라 극장노동자 전체로 범위를 확대했다는 것이 노조위원장 박상종씨의 설명. 다른 지역의 경우, 노조의 필요성은 인식하면서도 "인사·복지·근무조건 등이 전적으로 극장주의 재량에 달려 있기 때문에 불이익을 두려워해 섣불리 나서지 못한다"는 것이 이들의 설명이다.

"최소한의 근로기준법만 지켜달라. 법정근로시간을 초과할 경우 수당을 지급하고, 법이 보장하는 주1회 휴무는 줘야 할 것 아닌가". 노조위원장이자 부산극장 영사기사인 박상종씨의 조심스런 주장이다.

영화를 운전하는 주체
<쉬리>의 상업적 성공 이후 거대자본이 영화계에 대거 유입되면서 국내영화산업의 덩치는 끝간 데 없이 커져만 가고 있다. 그러나 영사기를 만지는 알프레도 아저씨들은 대형화된 극장의 그늘 속에 방치돼 있다. 그들은 신기술을 익힌 젊은 세대나 디지털화된 기계 때문에 알게 모르게 3D 업종인 이 일자리나마 잃게될까봐 늘 불안에 떨고 있다.

복지의 사각지대에 갇혀 신기술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는 영사기사들에 대한 제도적 대책이 고려될 때다. 'www.cinedriver.or.kr', 영화를 운전하는 주체라는 영사기사들의 자부심이 우러나는 영사기사협회 홈페이지 주소가 무색하지 않게 말이다. (2001년 3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