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일주일 전 성공적으로 소개팅을 치루었던 친구가
늦은 밤, 술 한잔하자고 전화를 걸어왔다.
예쁜 그녀가 성격도 좋다며 꾀나 들떠 있더니만,
왜 더 만나보지도 않고 벌써 그만두었는지 대뜸 따지고 드는 나에게,
친구는 석연치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슴이 두근거리질 않아서.."

이제 누군가에게 특별한 감정을 갖는 것조차 일상처럼 단순해야 하는 것인지..
아직도 그런 것들을 포기하지 않는 그 친구의 모습이 합당한 것인지..
판단이 서질 않아 우리는 밤새 술잔만 비우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 나는 왜 이들의 맹목적인 사랑을 지켜보게 된 것일까..
그들과 나의 만남도 길을 걷다 무심코 주어버린 사랑처럼..우연한 것이었을까?!

성을 사랑하는 것이 문제라고?!

성의 의미와 역할에 대한 인식이 아직 불투명했을 나이에..
나는 <필라델피아>를 통해 동성애를 경험했었다.
예쁘게 포장된 그들의 사랑을 보며.. '그래..동성간에도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어!
단지 취향의 문제인 거야' 라고..너무나 단순한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나는 줄곧 스크린 속에서나 주변에서나 동성애자들을 만날 때마다 이유없이 관대한 태도(?)를 보여 왔다. 하지만 대식이 이성애자인 석원에게 표현할 수조차 없었던 사랑을 보면서 나는 자신에게 묻는다.

'내게 고백하는 동성애를 평범한 그 남자의 사랑처럼 똑같이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마도 구구절절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라는 것을 가능한 쿨~하게 설명해주고
어떻게든 도망쳐 나가보려 궁리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평생을 살아도 대식을 이해할 수가 없다.
단 한번 꺼내어 보여줄 수조차 없었던...석원의 절망마저 공유하기를 원했던...
대식의 절대적인 사랑! 그것을 나의 것으로 만들지 못했다는 것이 나는 아직도 아쉽기만 하다.

동성을 사랑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고?!

'짝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커뮤니케이션이거늘... 일방적인 외침이 어떻게 사랑일 수 있나?!'
정말 큰 소리로 잘난 척 하던 나는 불쑥 내 눈앞에 나타난 그에게 정신을 잃어 일년간 가슴앓이를 했던 기억이 있다. 사람 마음이 뜻대로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되지 않을까... 헛된 공(?)을 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일주를 보면서 나는 그 당시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넘실거리는 파도에 충동적으로 몸을 맡길 만큼 감정에 솔직한 그녀.
일주는 굳이 동성애자인 대식을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래서 대식에게 맘을 열어보라고 생떼를 써보기도 하고, 그에게 가장 소중한 석원을 훔쳐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아 버린 일주에게 남은 건.. 지긋지긋한 지침의 연속으로 삶을 연장하는 방법뿐이었다.

내가 일주였다면, 내가 짝사랑했던 그가 동성애자 였다면..
나 아직도 이처럼 가볍게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동성애는 이성애와 마찬가지, 혹은 기호의 차이라고..

결국,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

한 발짝 차이로 거처가 중산층 아파트에서 서울역 지하보도로 옮겨진 남자. 그러고도 더 추락하고 싶어 환장해버린 남자. 어눌하면서도 이기적인 인간의 냄새를 풍기는 석원은 우리와 가장 닮아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길속에서, 대식의 사랑이 불편했으며, 일주의 몸짓이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다만, 나와 대식의 차이가 있다면, 그는 모두를 잃고 되돌아오던 길. 한 사람에 대한 사람으로서의 사랑을 체험했으며, 어쩜 그것은 그의 첫사랑보다 혹은 끝내 포기하지 못했던 아내와의 안정된 사랑보다 치열했을 것이다.

모든 여정이 끝이 나고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헤매고 있을 때, 길은 우리에게 많은 가능성을 선사한다. 물론 그 길이 끝나는 곳에 아무것도 없을지, 새로운 길이 다시 시작될 지는 알 수가 없다. 아직도 우리 모두는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