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눈의 생김새 때문에 적잖은 오해를 받을 때가 종종 있다.
크지 않아 이목구비 중에 도드라져 보이는 것도 아닌데..
부릅뜨면 감추어지는 속 쌍커플에 움푹 들어간 모양이 꾀나 날카로운 느낌을 주는가 보다.
아마 남자 였다면 그것이 카리스마 정도로 칭찬받았을 법도 한데,
유감스럽게도 나는 현실적이며 논리적이라는 인상을 풍기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이것을 '유감스럽다.' 라고 말하는 것은 못내 아쉬운 점이 남기 때문이다.

무림의 절대 고수가 되어 목숨보다 아끼는 검을 차고 무예를 닦는..
새처럼 가벼운 몸으로 공중을 날며, 긴 생머리는 하늘을 덮고 두 발을 나뭇잎처럼 구르는..
한낱, 사랑보다는 대의를 지키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전진하는...

가끔은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보다 무협영화의 여주인공이 되고 싶은 내 마음을 누가 헤아려 줄까 말이다. 그래서 나는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나의 소박한(?)꿈을 스크린 속에서 내내 풀어버리곤 한다. 그럴 때 내 눈빛은 세상에서 가장 비장하며 파르르 떨리는 입술은 이미 무림의 이치를 죄다 간파해 버린 듯 하다.

내가 <와호장룡>을 통해 마음을 수련하고 기예를 절제했다면 <영웅>에서는 무수히 많은 변화를 거듭하면서 기량을 맘껏 내보일 수 있기에(?) 몸은 고되었지만 마음은 평안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영화 보기를 만만히 한다면, 눈만 즐겁기를 기대한다면 오산이다. 진나라의 영정과 무명이 조나라의 무협고수들에 대한 관점을 보일 때마다 의상과 자연만물의 색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읽혀지는 캐릭터의 색채는 영화보기를 다채롭게 해주기 때문이다.

십보 쾌검의 달인_무명

왕의 암살을 위해 조나라의 협객들과 손을 잡은 무명은 그들의 보이지 않는 충의와 애증을 전달하는 인물이다. 그와의 거리 십보 안에서는 어떤 것도 그의 칼날을 피해갈 수가 없는 빠르고 정확한 손놀림을 보인다. 오직 왕의 암살을 꿈꾸며 10년 동안 무예를 닦아왔지만, 파검이 보여준 '천하'라는 단어의 뜻을 이해하면서 영웅으로 남게 되는 인물이다. 위력을 보이는 검정색 의상을 입은 무명이 진나라 무적 활 부대가 쏟아내는 화살 폭풍을 온몸으로 받아낼 때, 나는 방금 전, 그가 황제의 목숨을 앗지 않으므로 영웅의 길을 택했던 원망스러움을 털어 버릴 수 있었다.

중원절대미의 기예_비설

파검을 사랑하지만 충절 앞에 뜻을 굽히지 않는 비설이 화살 폭풍으로부터 온몸으로 연인을 지키는 장면에서 그녀의 정열적인 붉은색이 도드라진다. 하지만 비설의 붉은 색이 가장 극명하게 표현되는 장면은 여월과의 대결에서 보여지는 질투의 감정이다. 노란색 잎사귀들이 물결치다가 붉은 색 잎으로 바뀌는 장면은 상상에서조차 재현하기 힘들 것이다.

공중 19검의 창안자_파검

붓글씨를 통해 검의 지조를 꾀 뚫은 파검이 공중에서 보이는 19가지 절예는 영정의 목에 검날을 들이댄 고수 중에 고수라는 사실을 명백히 검증해 준다. 사랑하는 여인의 희생을 슬퍼하며 호수 위에서 무명과 검을 맞대는 장면은 그의 푸른 색 의상이 절정으로 인식되는 지점이다. 자신의 목숨조차 희생할 수 있다는 결의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민중에 대한 고달픈 애정 때문에 세 명의 협객이 평생을 꿈꿔온 명분을 잃게 만들지만 비설에게 사랑의 믿음을 보이기 위해 자신의 몸에 그녀의 검을 관통시키는 순간, 영화의 모든 내러티브를 '천하'라는 단어하나로 우습게 만들어 버린 그를 용서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그리고 흰색 옷을 입은 파검과 비설이 검을 맞대면서 보여주는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에 대한 확신은 그 동안의 여정을 모두 잊게 만들만큼 숭고한 사랑을 풀어놓는다. 민중의 평안을 위해 복수를 양보하고 몸을 희생했던 그들의 선택이 과연 옳았는지.. 쉽게 판단할 수는 없지만 서로에 대한 신의를 굽히지 않았던 영웅들의 모습은 너무나 너무나 아름다웠다.

허망한 상상으로 지칠만큼 지친 연휴의 마지막 날에, 나는 이렇게 비장한 마음을 접고 내일을 준비해본다. 지루한 시비가 엇갈리는 나의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