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참을 수 없이 하찮아. 하찮아서 미칠 것 같아”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제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느껴지던 어느 날, 그 친구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게 바로 너의 문제야.. 왜 너는... 항상 너는....'

모르고 있던 나의 결점에 새삼 당황했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상처가 두려워 사실을 직면할 만한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정말 나의 문제는...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오만과 관계에 대한 맹목적인 착각이었던 것이다.

행복할 준비가 되어있던 어느 크리스마스 이브에, 미흔이 느꼈던 아픔도 이와 같지 않을까...
그것은 남편의 불륜에 대한 배신감도 아니었고, 붉은 스웨터를 입은 그녀에게 성적억압을 당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스스로에게 어긋나지 않는 것 처럼 보였던 지난 삶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믿음이 사라져버린 그곳에 남아있는 것은 참을 수 없이 가볍게 느껴지는 자신의 존재감이었다.

남편은 사회봉사라도 하듯이 미흔을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한다.
그것이 지금의 미흔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과거의 미흔을 위한 것이라는 것도 모르는 체 말이다.

하지만 미흔은 남편을 용서할 겨를이 없다. 이제서야 비로서 알몸으로 세상에 나왔기 때문이다.
그녀의 두통을 가라앉혀줄 수 있는 것은 남편이 희생했다고 여기는 그의 삶도 아니고,
이웃 남자에게서 얻는 쾌락도 아닌..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인정하고 그 자체로서 누군가에게 이해받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결코, 남편의 연애에 맞장을 뜨는 기분으로 게임을 택한 것이 아니었다.

"먼저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지는 거예요. 그리고 게임은 끝나는 거지요." "당신을 너무 사랑해서…, 견딜 수가 없어."

결국, 미흔이 선택한 것은 사랑이었다. 다만, 사랑이 갖는 유치한 상상과 막연한 기대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기 위해 그들은 계속 게임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게임속에서 미흔은 비로서 자신이 살아있다는 희열을 느끼게 된다. 그 생동감은 그녀의 삶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전신으로 사랑을 나누는 순간은 자신의 몸이 허락하는 아름다움을 맘껏 누릴수 있었으며..그리움이 견딜수 없으면 잠옷 차림으로 창문을 뛰어 넘기도 했다. 남편의 여자에게도 느끼지 않았던 질투심으로 흥분을 하기도 했다. 또한, 미흔은 거듭나는 그녀 자신을 통해 한 남자의 삶을 소생시키게 된다. 무력감에 빠져 삶의 허무에 허덕이던 인규를 너무 멀리까지 데리고 가버린 것이다.

자신들이 잘 되지 않을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서로에 대한 이해와 소통이 가능한 그 지점을 연장시켜보고 싶었던 미흔과 인규.. 두 사람의 사랑은 그렇게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끝을 본다. 그리고 그 사랑이 잉태한 것은 이제야 비로서 자유롭게 헤엄을 쳐 나갈 수 있게된 서른의 몇살의 미흔이었다.

나는 그동안 섹스로서 여성운동을 시도하는 영화도 보아왔고, 고생고생 지겹게 살아간 어머니의 삶을 그린 무수한 영화들에 눈물 잠깐 흘려주기도 했었다. 하지만 진정 여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지루할 만큼 이토록 집요하게 들려주는 영화는 처음이었다.

부디, 이영화를 보게될 수많은 남자들과 아직 덜 자란 얼마의 여자들이..
미흔이 남편을 향한 무모한 복수나 무료해진 자신의 삶에 짜릿한 자극을 주기 위해 게임을 받아들였다고...
미흔이 육체적 욕망속에서 거듭난 것이었다고..만, 생각하지 않기를...바란다.
치열했던 자아와의 대면과 인정하기, 이해받기를 통해 고통을 찬란하게 아름다운 일생의 한 순간으로 승화시킨 미흔을 더욱 이해준다면, 그녀에게 말을 걸기가 훨씬 수월해 질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