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원 장승업의 거침없는 붓을 쫓아가듯, [취화선]은 임권택감독의 전작들과는 다른 행보로 달음박질친다. 조선후기의 격변기를 막힘 없는 붓끝으로 살아온 장승업에 대한 살풀이 마냥, 롱테이크와 긴 호흡은 과감히 버리고 단거리 질주처럼 빠르게 흐르는 화면과 거칠도록 짧은 숨은 강렬한 색채와 맞물려서 진하게 스크린을 채색한다. 어김없이 한국의 절경들은 화면에 고스란히 담아지고, 선 굵은 최민식의 연기는 신명난 박수무당처럼 호쾌하기만 하다.

느림을 버리고 빠름을 선택한 임권택의 결정은 분명 탁월해서, 전개는 점프컷을 보는 것처럼 과감하게 흐르고 이에 따르는 감정의 변이는 다양하기만 하다. 하지만, 그에 상응하게 감정의 유지는 속도에 미쳐 부흥하지 못하고 끊기기를 반복하고 결국에는 영화가 마침표를 찍을 때쯤에는 감정의 몰입이 하나로 귀결되지 못하는 혼란스러움을 낳는다.

카메라의 장인 임권택이 바라본 붓의 장인 장승업은, 치열한 시대를 더욱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으로 부닥쳐온 진정한 예술인의 모습으로 그렸지만...치열한 삶만큼이나 영화에 담겨진 많은 이야기들은 서로의 몸짓에 부대껴서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되지 못하고 여러 장의 그림이 한 장의 화선지위에 내려앉은 것처럼 지독하게 빼어나지만 혼란스럽다.

조선후기라는 카오스와 그 시대를 살아가는 방식에 갈등하는 예술인, 신분의 족쇄를 맨손으로 끊으려는 광기와 독선, 신분의 족쇄처럼 붓의 시작이 모방에 근거한다는 열등감, 자신만의 붓끝을 찾고 완성하려는 끝없는 자기고행,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충실한 자유인의 자취, 사랑에 대한 근원적인 목마름, 붓끝에 담긴 세상과 일치하고픈 열반의 경지...이 모든 것이 붓끝으로 한 장에 담겨야한다는 사실은 애초에 무리수가 있지는 않았을까.

어느 하나라도 과감한 전개방식처럼 버리는 의식을 거쳤다면, 건너뛰는 행위를 찾았다면...
이 아름다운 예술품은 이처럼 혼란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름답기에, 담고자 하는 색이 넘쳐나기에 그 아름다움만큼이나 치명적인 혼란이 배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지독하게 아름다운 영화...그리고 그만큼의 생각과 혼란...[취화선]은 결코 놓쳐서는 안될 진짜 장인의 예술품, 바로 그 자체일지 모른다.
완벽하지 않기에 아름다운 예술의 경지...[취화선]이 닿아있는 정점은 바로 이런 모습이다.

코리아필름 정조웅 기자

장승업은 현종 9년(서기 1843년)에 났다. 정확한 출생지는 알 수 없고, 그가 다만 대원장씨였다는 것과 일사유사(逸士遺事)에 의하여 그의 집 가문이 무반이었다는 것, 그리고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집안이 빈한하여 의탁할 곳이 없으매 연소할 때 서울에 표박하여, 모 한약국에서 심부름을 하였다는 말도 있고 수표정 이응헌 집에 기식하였다는 말도 있으며, 혹은 변원규 집에서 고용살이를 했다는 말도 있다.

(중략)술을 즐겨 하기에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였으니 그림을 그릴 동안은 반드시 술이 옆에 놓여야 하고, 술이 놓였으면 반드시 미인이 그 옆에 있어야 했다.
(중략)부귀와 세속적인 가치에 뜻을 두지 않았으니 오직 세력과 부귀의 힘을 빌어 그림을 청하는 이가 있으면 비록 그 세력에 못 이겨 생명을 빼앗기는 한이 있을지언정 예술을 허여(許與)하지는 아니하였다.

(중략)오원의 화명이 자자하니 고종 황제께서 오원을 불러 어병 십수첩을 그리게 하여 금중(禁仲)에 부르시어 방 하나를 치우고 찬감(饌監)에게 명하사 하루 두어 차례씩만 두 서너잔 술을 주도록 하시었다. 주는 술로는 마른 목을 달랠 길 없어 금졸을 꾀어서 야반에 탈주를 하여 그가 평소에 잘 다니던 술집으로 일사천리 달음질하였다.

(중략)오원은 광무 정유(서기 1897년)에 54세로써 죽었다고 전해지나 행방불명인 채 없어졌다고 하는 말이 더 믿을 만하다. 오원이 평소 늘 말하기를 사람의 생사란 부운과 같은 것이라 하였으니, 오원과 친교를 맺었다는 청일전쟁 당시의 종군기자로 서울에 들어온 해포독미(海浦篤彌)는 '그는 필연코 신선이 되었다' 라고 했다고도 한다. 혹자는 금강산으로 들어갔다라고도 한다. 1938년 -김용준(<근원수필> 중에서)

오원 장승업은 단원, 혜원과 더불어 삼원으로 일컬어지며 신품으로 추앙 받는 조선시대 최고의 화가입니다. 하지만 불과 100여년 전의 실존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적은 신비화된 기행 속에 가려져 왔으며, 신품이라 칭송되는 그의 예술적 성과에 대한 정당한 평가도 유보되어 왔습니다. '기행을 일삼은 천재화가'라는 작은 호기심에서 출발했던 이 이야기가 결코 한 예술가의 삶만을 재구성해내는 영화가 될 수 없다는 자각은 충격이었습니다. 19세기말이라는 역사적인 특수성, 그리고 동북 아시아의 작은 나라 조선이라는 공간, 그리고 그 좌표 위에서 천한 재주로 이름을 얻었던 '환쟁이', 오원 장승업. 이 세 요소는 영화 <취화선>속에서 단단히 얽혀 서로를 설명하고 이해시킵니다.

왕명에도 꿈쩍하지 않고 내키는 대로 살았던 자유인이다, 술과 여자가 있어야 그림을 그렸다는 등의 기행으로만 알려진 오원 장승업이지만 나는 그렇게 그분을 느끼지 않습니다. 암울한 세상을 살아나가며 자신의 예술혼을 지켜내려는 힘겨운 내적인 고뇌와 부대낌이 그러한 모습으로 표출되었을 뿐, 스스로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한 예술가의 절박한 고뇌와 의지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예술에 대한 자부심, 그 한켠에 자리잡고 있는 절대적인 경지를 향한 스스로의 채찍질, 그 예술혼이야말로 내가 <취화선>을 만들게된 가장 직접적인 이유입니다.

또한 동양화의 범주에 들어가는 한국화의 미학에 대한 생각입니다. 전통과의 단절 혹은 자기부정으로 점철된 근대화의 영향력 아래, 서양의 미학적 틀거리만이 절대치가 되어 버린지 오래입니다. 그 속에서 잊혀져가고 있는 한국화의 미학과 정신, 이것은 어쩌면 내가 영화를 통해서 찾고자 노력했던 '한국적' 미학과 가치의 또 다른 이름일 것입니다. 즉 서구기계문명의 산물인 영화의 메카니즘과 한국의 전통적 내러티브가 어떻게 결합될 수 있을지를 소리로 실험해 보였던 <춘향뎐>과는 달리, <취화선>은 회화라는 시각적 요소를 통해 찾아나가려는 과정인 것입니다.

이것은 감독으로써 내가 나고 자란 자연과 역사를 어떻게 재단하여 카메라에 담아왔는가에 대한 뼈아픈 점검이 될 것이며, 또한 현실의 고난한 무게를 견디며 자기완성을 향해 가는 예술가의 치열한 고뇌에 대한 작은 헌사가 될 것입니다. 술 취한 그림의 신선, <취화선>을 준비하면서 내가 만났던 오원 장승업은 100년이 지난 지금, 붓 대신 카메라를 통해 그 고민을 계속해내 가는 나의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연출의도)

감독 임 권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