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으니 그리 좋나"

합천군 가회면에 사는 박노인의 부음을 전화로 전해듣고, 영화감독인 큰 아들 찬우와 그의 처 혜리, LA에 사는 셋째아들 찬세, 레스토랑을 경영하는 버림받은 딸 미선, 각지 각처에 흩어져 다양하게 살고 있던 일가들이 분잡 스럽게 고향으로 몰려든다.

몇십궤짝인지도 모르는 소주와 맥주 박스가 관처럼 쌓이며, 죽음처럼 적막했던 마을은 갑자기 오일장이 서는 시골 장터처럼 활기가 넘치고 잔치집처럼 분주해진다.

돼지 멱따는 소리와 곡소리가 뒤범벅인 상가. 어머니는 아무말 없이 계속 늦게 오는 자식들만 기다리고 호상은 예를 갖춰야 한다며 상가 주위를 쉼없이 감시한다.

행랑방에 사는 씨가 불분명한 바우라는 악동은 술병 하나를 들고 초상집을 휘젓고 다니며 아수라장을 만든다. 영화감독인 큰아들 찬우는 맏상주 자리에서 내밀리고 상가집을 '영화'로써 바라보기 시작한다.

뒤늦게 도착한 LA에 사는 기독교신자 찬세가 독경소리가 울려퍼지던 영전 앞에서 찬송가 < 요단강건너가 만나리 >를 부르기 시작한다. 한편 죽은 오빠의 시신 앞에서 통곡을 하던 보험 외판원 작은 고모는 울음을 그친 후 보험가방을 들고 문상객들과 로비를 한다.

아버지 속만 썩여온 막내 딸 미선은 뒤늦게 기둥서방 태식을 데리고 나타나 서럽게 울기만 한다.

읍네 로타리 다방 고마담과 미스안, 비디오 가게 주인 장달효까지 상가에 들이닥치면서 상가는 한바탕 난장판이 되는데,산 사람들에게는 장례식도 만나고 먹고 마시며 세상일을 이야기 하는 삶의 연속일 뿐이고 대부분 죽음에는 무심하다.

출상전야가 되어 망자의 극락왕생을 비는 빈상여놀이가 벌어지고 죽은자와 산자가 어울어진 굿판은 슬프고도 화려하게 펼쳐지고 있는 중 갑자기 '쾅' 하는 폭발음이 들려온다....

『학 / 생 / 부 / 군 / 신 / 위』

박철수 감독이 머릿 속에서만 만들고 지우기를 반복한 것도 10년이 남짓된 영화. 박철수 감독이 이미 10년 전 황지우의 시(詩) '여정'을 읽고 영화적 모티브를 얻은 이후로, 작성한 유형, 무형의 콘티만 쌓아도 아마 수십미터 높이는 족히 된다. 10년동안 여러차례 '학생부군신위'의 영화화를 시도해 왔으나, 선뜻 '만들겠다'고 나서는 영화사도 없었으며 불만족스러운 제작 조건에서 어영부영 제작자들과 타협해 가면서 만들고 싶지 않았던 터라 창작의 자유를 100%보장받고, 작가적 상상력을 온전히 인정받을 수 있는 "때"를 기다려 왔다. 좋은 조건을 기다린 지 7년째 되던 해, 박감독 그 자신이 부친상을 겪었고, 바로 그 자리에서 가슴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그리고 3년이 더 지나간 오늘, 이 작업은 박감독 개인적으로는 실로 10년동안의 화두를 푸는 행위로, 박철수 필름으로서는 영화 기획에서의 장인 정신을 마음껏 발휘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경상남도 합천군 가회면 덕촌리로 간 이유

최근 구속된 전 대통령 전두환의 생가가 있는 곳이기에 촬영 장소를 물었을때 '합천'이라고 대답하면, 관계자들은 실소 하고 만다. 우연찮게 '학생부군신위'의 촬영지와 전 대통령의 생가가 일치하기 때문인 듯 하다. 박철수 감독은 '스크린에 자주 등장하는 수평구도는 넓은 땅을 가진 미국이나, 호주 등에나 어울림직 하지만 종종 수평구도가 한국 영화에 사용된다. 나는 더이상 한국 지형에 맞지 않는 수평구도로 영상을 잡고 싶지 않다. '학생부군신위'를 통해 수직적 구조'의 새로운 화면을 이루어 내겠다는 박감독의 의도를 가장 적절하게 대변하고 있는 곳이 바로 합천군 가회면 덕촌마을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합천군 가회면 덕촌마을로 갔다.

합천군 가회면 주민들의 적극 협조로 250여명의 대규모 문상객 조성

주요 배역인 바우역에 김봉규 어린이 현지에서 직접 캐스팅 '학생부군신위'의 99%를 촬영한 합천군 가회면 주민들의 적극적인 협조는 많은 돈을 들이지 않고도 웅장한 스케일의 영화를 만드는 등 촬영진행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특히 주연 배역인 동네 악동 바우 역은 촬영현지인 가회면에서 직접 캐스팅하여 영화의 현실감을 더욱 살렸다. 아마추어임에도 불구하고 어린아이의 순수한 눈으로 상가를 바라보는 진솔한 연기를 정확히 소화해 낸 김봉규군은 연기자들과 스탭들의 사랑을 독차지 하였다.

촬영에 사용된 술 2000여병, 폭발용 아카디아 승용차 1대,
현지에서 직접 잡은 돼지 3마리 대규모 소품 등장

다른 영화들에 비해 많은 제작비를 투여하지는 않았지만, 촬영 장면에 꼭 필요한 소품들은 아낌없이 사용하였다.상가의 북적거림을 상징하는 술병만 2000여병이 등장했고, 느닷없이 최고급차 아카디아가 화염에 휩싸였다. 또한 한두마리의 돼지로 모자라 3마리나 잡는 등 대규모의 소품들이 상가집에서 사라져갔다. 결과적으로 많지 않은 돈으로도 대작다운 분위기를 창출하는데 확실히 성공했다.

박노인(최성)

시공을 초월하는 영화 속 등장으로 떠나버린 사람이란 느낌 보다는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잔치를 구경하는 사람.

부산동아대 경제학과 졸업
1956년 처녀작 "다정도 병이련가 가거라 슬픔이여" "돌아오지 낳는 해병" 이후 다작 출연.
현 영화배우협회 소속

어머니 (문정숙)

인고의 세월을 보내온 어머니는 아버지의 죽음에 말이 없다. 그저 조용히 앉아 상가의 정경을 바라보지만, 가슴에 맺힌 한은 곡을 하는 어느 누구에 비길수 있을까.

호 상(권성덕)

무너져 가는 윤리의식과 도덕성을 보며 안타까와 한다. 상례를 유교적 관습에 입각하여 가장 정확하게 치루어내려 하는데 날이 갈수록현대화, 도시화 되고 있는 가족 문상객들은 좀체 호상의 엄격함을 거추장스럽게만 생각한다.

찬 우(박철수)

망자의 첫째 아들. 직업은 영화 감독이다. 영화는 그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감성에 의존하지 않고 상황을 객관화 시키는 관조적 역할이다. 장례가 진행되는 동안 부인과의 불화, 통제할 수 없는 상가집의 좌충우돌하는 상황 등으로 무력감에 쌓이게 된다.

혜 리(정하현)

찬우의 아내. 현대 문명의 이기성을 상징하는 여인이다.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남편 찬우를 무시하며 시아버지의 상례 도중에도 서울서 운영하는 레스토랑의 상황만을 걱정할 뿐 상례에는 도통 정성을 보이려 하지 않는다.